한국과 러시아가 관계 개선 가능성을 잇달아 언급하면서 경제협력 재개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대러 제재와 북러 군사협력, 미국의 대러시아 정책이 여전히 핵심 변수다. 미러 협상 재개가 한러관계에 어떤 기회를 제공할지 주목된다.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는 외교적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북극항로 개발을 계기로 러시아와의 관계 관리 필요성을 강조하자 러시아 외무부는 한국이 실질적인 관계 개선 조치를 취한다면 환영하겠다고 화답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냉각됐던 양국 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다.
여기에 미국과 러시아의 대화가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0월 2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특사 스티브 위트코프를 만나 우크라이나 전쟁 해결과 양국 경제협력 복원 방안을 논의했다. 한러관계 개선을 둘러싼 외교적 환경에도 변화의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다만 외교적 대화의 재개가 곧바로 제재 해제나 기업들의 러시아 시장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관계 개선과 미국·유럽의 제재체계 변화에 영향을 받는 경제협력은 구분해서 살펴봐야 한다.
러시아 외무부의 메시지, 무엇이 달라졌나
이번 외교적 움직임의 출발점은 한국 정부의 실용외교 기조와 북극항로 개발 정책이다. 이 대통령은 10월 13일 국무회의에서 러시아와의 관계 관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같은 날 부산에서는 북극항로 시범운항을 마친 팬스타 아크로호의 귀항을 환영했다. 이 선박은 부산에서 영국까지 화물을 운송하는 데 약 20일이 걸려 새로운 물류 경로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러시아도 한국 정부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차관은 20일 한국의 관계 정상화 의지를 인식하고 있다면서 실질적인 조치가 뒤따른다면 환영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러시아는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우크라이나 전쟁에 종속시키지 않는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를 러시아의 무조건적인 관계 개선 제안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루덴코 차관은 양국 관계 악화의 책임이 한국의 대러 제재 동참에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9월 25일 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한국이 서방의 대러 제재에 참여하는 한 관계 개선은 불가능하다고 밝힌 바 있다.
두 발언을 함께 보면 러시아는 제재가 유지되더라도 외교적 대화와 제한적인 실무협력에는 문을 열어두면서, 본격적인 경제관계 복원에는 제재 정책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양국 직항편 재개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루덴코 차관은 항공당국과 항공사 차원의 협의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아직 성과를 논하기는 이르다고 밝혔다. 운항 재개 일정이나 구체적인 합의가 확인된 것은 아니다.
미러관계의 변화, 경제협력으로 이어지기 시작
한러관계의 미래를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외부 변수는 미국의 대러시아 정책이다. 이번 푸틴·위트코프 회담이 주목되는 이유도 단순한 종전 논의를 넘어 양국 경제관계 복원이 실제 협상 의제로 등장했다는 데 있다.
회담은 약 3시간 동안 진행됐다. 러시아 대통령실의 유리 우샤코프 외교정책 보좌관은 회담 후 푸틴 대통령이 11월 중순께 미국·우크라이나와 3자 협상을 재개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개최 장소로 아부다비가 거론됐지만 구체적인 일정과 종전 조건까지 합의된 것은 아니다.
경제 분야에서는 더욱 구체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미국은 10월 9일 러시아산 경유 거래를 허용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의 일반허가 제135호는 러시아산 경유의 판매·운송·하역·수입 관련 거래를 2027년 4월 7일까지 한시적으로 허용한다. 우샤코프 보좌관은 21일 회담에서 양국이 경유 공급 합의의 이행과 대규모 공동 경제사업을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미국이 특정 경제적 필요에 따라 대러 제재의 일부를 조정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러시아에 대한 금융·기술·무역 제재가 전면 해제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럽연합(EU)은 10월 12일 러시아 군수산업 관련 개인과 법인 1,569곳을 추가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미국과 유럽의 정책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 개선이 한국에 우호적인 외교적 환경을 조성할 수는 있지만, 한국 기업에 적용되는 제재와 수출통제까지 자동으로 완화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협력 재개, 기대와 현실 사이
한국 기업들의 러시아 시장 복귀 수요는 여전히 존재한다. 한국무역협회의 2025년 조사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러 수출을 중단한 기업의 79.2%가 재진출에 긍정적인 의향을 보였다. 기존 거래처와 시장 잠재력을 유지하려는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결과다.
하지만 교역 규모는 크게 줄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21년 한러 교역액은 273억4,000만 달러였으나, 외교부가 집계한 2025년 교역액은 약 109억 달러로 축소됐다. 2025년 한국의 대러 수출은 40억4,000만 달러, 수입은 68억9,000만 달러다.
기업들의 복귀에도 구조적인 장애물이 생겼다. 현대자동차는 2026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의 재매입 권리 행사 기한을 넘겼다. 향후 정치적 여건이 개선되더라도 과거 생산시설과 시장 점유율을 그대로 회복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한국의 독자적 관계 정상화에는 분명한 한계
한국 정부는 러시아와의 외교적 소통, 북극항로 운항 협의, 인적 교류, 제재에 저촉되지 않는 교역 등을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결제망, 첨단기술 수출, 대규모 투자와 설비 공급을 복원하려면 한국의 수출통제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금융·제재 환경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현재 군사적 전용 가능성이 있는 비전략물자 1,402개 품목에 대해 대러 수출 시 개별 허가를 요구하고 있다. 이 대통령 역시 북극항로 사업을 추진하면서 국제사회의 제재 원칙을 철저히 준수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북러 군사협력은 한러관계 정상화의 독립적인 안보 변수로 남아 있다. 러시아가 북한과의 군사협력을 계속 확대한다면 미국의 대러 정책이 완화되더라도 한국은 한반도 안보를 고려해 협력 범위를 결정해야 한다.
이런 조건을 종합하면 한러관계는 외교적 소통과 제한적인 실무협력부터 확대될 여지가 있다. 북극항로의 운항 지원, 합법적인 소비재 교역, 기존 기업의 고객 지원, 항공편 재개를 위한 기술협의 등이 검토 가능한 분야다. 반면 자동차 현지 생산과 대규모 산업투자, 금융협력의 전면 복원은 훨씬 복잡한 문제다.
결국 향후 정상화의 속도를 가를 변수는 세 가지다. 11월 미러·우크라이나 협상의 실제 진전, 미국과 유럽의 제재 정책 변화, 그리고 북러 군사협력과 관련한 안보 환경이다.
현재 한러관계에서 확인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양국이 상대방의 관계 개선 의사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다만 외교적 기대가 실질적인 경제협력으로 이어지려면 정치적 메시지를 넘어 제재와 결제, 운송, 투자에 관한 구체적인 제도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한러관계는 대화 재개의 가능성이 커진 단계에 있다. 본격적인 경제협력 정상화의 조건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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