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중앙은행이 벨기에 유로클리어를 상대로 제기한 2,000억 유로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유지했다. 그러나 EU의 집행 차단 조치로 실제 회수는 불투명하다. 서방과 러시아가 서로 묶어둔 자산의 규모와 법적 지위도 달라 자산 반환이 장기적인 금융·외교 협상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서방에 동결된 외환보유액을 되찾기 위한 법적 공방에서 또 한 차례 승리했다. 모스크바 관할 중재법원은 22일 벨기에 국제예탁결제기관 유로클리어(Euroclear)의 상고를 기각하고 약 2,001억 유로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기존 판결을 유지했다.
러시아 법원은 지난 5월 15일 중앙은행의 청구를 인용하고 같은 달 26일 즉시 집행을 명령했다. 이번 판결로 러시아 내 소송에서는 중앙은행의 승소가 유지됐지만, 벨기에에 보관된 자산을 실제로 반환받을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서방에 묶인 러시아 자산, 실제 규모는 얼마인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서방이 동결한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자산은 집계 범위에 따라 약 2,600억~3,000억 유로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EU 관할 자산은 약 2,100억 유로다.
유로클리어의 2026년 상반기 공시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러시아 제재 관련 자산은 2,020억 유로로, 전체 은행 대차대조표 2,410억 유로의 약 84%를 차지한다. 다만 이 금액은 러시아 중앙은행 자산만을 뜻하지 않으므로 중앙은행의 손해배상 청구액과 동일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청구액에는 동결된 자산 가치와 관련 손실 및 일실이익이 포함된다.
동결자산의 상당 부분은 당초 유럽 국채 등 유가증권이었지만 만기가 도래하면서 현금으로 전환됐다. 유로클리어는 이 현금을 운용해 발생한 수익 중 일부를 EU에 납부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2026년 8월까지 동결 러시아 중앙은행 자산에서 발생한 초과수익 가운데 EU에 이전된 금액은 누적 80억 유로에 이른다. 이 자금은 우크라이나 지원 대출의 상환과 군사 지원에 활용된다. 원금의 직접 몰수와 운용 과정에서 발생한 초과수익의 사용은 법적으로 구별된다.
러시아 법원에서 이겨도 벨기에에서 돈을 받을 수 없는 이유
이번 소송의 핵심은 판결의 집행권이다. 러시아 법원은 유로클리어의 자산 동결을 손해배상 사유로 인정했지만, 유로클리어는 EU 제재법에 따른 조치라며 러시아 법원의 관할권과 판결 효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EU도 법적 방어망을 강화했다. 2026년 7월 채택한 제21차 대러시아 제재 패키지는 제재와 관련된 러시아 법원 판결의 인정·집행을 거부하고, 제3국에서의 집행 시도를 억제하는 법원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이에 맞서 9월 15일 EU 일반법원에 관련 규정의 적법성을 다투는 소송을 제기했다. 재산권과 사법적 구제권, 중앙은행 자산의 주권면제를 침해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EU는 제재 집행과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법적 조치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자국이나 중국·아랍에미리트·카자흐스탄 등 제3국에 존재하는 유로클리어 재산을 대상으로 판결 집행을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국가 법원의 판결 승인과 집행 대상 재산의 확인이 필요하다. 설령 일부 자산을 압류하더라도 2,000억 유로 전액을 회수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러시아에 묶인 서방 자산도 수천억 달러인가
반대편의 자산 규모는 더욱 불투명하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러시아의 특별관리계좌인 C형 계좌에 약 3,000억 달러의 외국 자산이 묶여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수치를 검증할 공식 통합 통계는 공개되지 않았다.
C형 계좌에는 비우호국 투자자가 보유한 러시아 주식·채권과 배당금, 이자 등이 묶여 있다. 예컨대 오스트리아 라이파이젠은행그룹(RBI)이 2026년 6월 말 공시한 관련 제한 자산은 약 21억8,000만 유로였다.
서방 기업의 러시아 내 공장·은행·유통망 등 직접투자 자산까지 포함하면 경제적 노출 규모는 더 커진다. 다만 정상적으로 영업하는 투자자산, 매각 제한 자산, 계좌 동결 자산, 정부가 임시 관리하는 재산은 각각 법적 성격이 다르다. 이를 모두 동결자산으로 합산해 서방의 러시아 중앙은행 자산 동결액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실물자산을 통한 맞대응은 이미 확대되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2025년 1월 이후 러시아가 임시 관리 대상으로 지정한 외국계 기업 20곳 가운데 미국 관련 기업은 3곳에 그쳤으며, 나머지는 유럽계였다. 최근에는 네슬레와 오샹, 메트로 등의 러시아 사업 자산도 임시 관리 대상에 포함됐다.
이는 법적 분쟁이 자산 동결을 넘어 기업 경영권과 투자 회수 문제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말은 법정이 아니라 정치·금융 협상에서 나올 가능성
현재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는 동결 상태의 장기화다. EU는 2025년 12월 러시아 중앙은행 자산에 대한 장기 동결 조치를 채택했고, 2026~2027년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900억 유로 대출은 러시아 자산의 직접 몰수가 아닌 EU의 자본시장 차입으로 조달하기로 했다.
벨기에의 바르트 더베버르 총리는 10월 21일 EU 집행위원회가 동결자산을 활용한 새로운 자금조달안을 제시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다만 다른 회원국들이 논의를 재개할 가능성까지 배제하지는 않았다.
결국 러시아가 대규모 자산을 회수하려면 제재 해제, 국제적으로 수용 가능한 법적 합의 또는 종전·배상 문제를 포함한 정치적 타협이 필요할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 내 서방 투자자산과 해외에 동결된 러시아 자산의 상계·교환도 협상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서로 다른 소유권과 법적 의무 때문에 일괄 교환이 간단하지는 않다.
이 분쟁은 한국 금융기관과 투자자에게도 중요한 선례다. 국제예탁결제기관을 통한 보유자산이라도 관할국의 제재와 상대국의 보복조치가 충돌하면 법적 소유권과 실제 처분권이 분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향후 러시아 관련 증권 투자와 금융거래에서는 수익률뿐 아니라 예탁기관의 소재지, 최종 보관 구조, 제재 적용 범위, 자산의 회수 가능성까지 검토해야 한다. 이번 법적 전쟁의 핵심은 판결금 2,000억 유로 자체보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자산의 안전한 보관과 집행 가능성을 어느 국가의 법이 보장하는가에 있다.
출처 코메르산트, Суд в Москве отклонил жалобу Euroclear на взыскание €200 млрд по иску ЦБ, 22.10.2026 러시아 법률·사법정보통신(RAPSI), Суд отклонил кассационную жалобу Euroclear на взыскание €200 млрд в пользу ЦБ РФ, 22.10.2026 유로클리어, Euroclear delivers sustained growth across core activities in H1 2026, 17.07.2026 유럽의회 조사처, State of play: EU support to Ukraine, 14.10.2026 EU 집행위원회, EU adopts 21st package of sanctions against Russia, 23.07.2026 러시아 중앙은행, Bank of Russia files claim with EU General Court to challenge restrictions on recognition and enforcement of Russian court orders in other jurisdictions, 17.09.2026 EU 집행위원회, EU receives €1.4 billion in revenue from immobilised Russian assets to be used for supporting Ukraine, 05.08.2026 로이터통신, How might Russia react to any EU decision to use its frozen assets for Ukraine?, 11.12.2025 인테르팍스, Объем заблокированных активов австрийского RBI на счетах "С" в I полугодии вырос на 22% и превысил 2 млрд евро, 31.07.2026 로이터통신, As Russia penalises European firms over Ukraine, US rivals largely spared, 22.10.2026 유럽이사회, European Council, 18 December 2025, Ukraine, 19.12.2025 브뤼셀타임스, PM De Wever 'certain' European Commission will not reopen debate on Russian assets, 21.10.2026
